공중위생, 변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여기 자산만 40조 원이 넘는 세계 최대의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Bill and Melinda Ga-tes Foundation)이 있다. 최근 게이츠 재단에서는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선보였는데, 위생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기존의 많은 국제기구들이 시도했던 정수시설 위주의 해법 대신, 이들은 “똥”에 대한 솔루션 개발에 집중했다.
그림 1. 선진국의 일반적인 하수처리 과정
이는 위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염된 물을 정화하는 방법 대신 물이 오염되는 근본 원인을 들여다보는 선제적인 문제 해결의 시각에서 출발한다. 개발도상국에서 가장 큰 수질 오염원은 공장 폐수도 아닌, 화학 비료도 아닌 사람의 분뇨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착안한 게이츠 재단은 세계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똥” 관련 공모를 진행하였고, 이것이 바로 “변기를 재발명하라(Reinvent the Toilet)”는 이름의 이니셔티브로 탄생했다.
이니셔티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최고의 변기를 발명하는 팀에게는 주어지는 상금은 10만 달러이다. 그렇다면 최고의 변기란 어떤 변기인가? 첫째로는 상·하수 처리에 필요한 일반적인 인프라, 즉 하수를 취합하고 저장, 운반 취합하는 배관 시스템 없이도 작동 가능해야 한다. 둘째, 개발도상국에서는 물이 귀하기 때문에 물 없이도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로는, 하루 이용 비용이 1인당 5센트 미만으로 저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배변물을 활용하여 또 다른 에너지원이나 생산재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작년부터 대학들을 대상으로 총 3백만 달러를 지원하며 공모를 받은 후, 2012년 8월 이니셔티브의 1차 결과들이 공개되었다. 대상은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팀에게 돌아갔는데, 이 팀의 변기는 태양광으로 작동되며 변을 분해하여 발생하는 수소로 전기를 발생시키는 특징이 있다.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은 이번 공모에 등장한 변기들의 프로토타입을 발전시켜 2014-15년경에 실제 개발도상국에 보급할 계획이다.
새로운 착상, 혁신적인 모델, 그리고 사용의 용이함 등과 같은 특징들을 갖춘 이 놀라운 변기들. 별도의 대규모 인프라 없이도 사용할 수 있으면서 실질적인 생활의 변화를 일으키는 이러한 저가의 제품을 만드는 기술을 ‘적정기술’이라고 한다.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 적정기술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란, 그 기술이 사용되는 사회 공동체의 필요 및 문화와 환경적 조건을 고려해 만들어진 기술로,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기술을 말한다. 적정기술은 ‘기술이 아닌 인간의 진보에 가치를 두는 과학기술’이라는 철학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종종 착한 기술,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 따뜻한 기술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적정기술은 본래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했는데, 이는 1960년대 경제학자 슈마허(E. F. Schumacher)가 제3세계의 발전 방향에 초점을 맞추고 제안한 개념이었다. 이후 1970년대 에너지 문제가 대두하면서 선진국에서도 한때 대안기술의 패러다임으로 조명되는 등 주목을 받았으나, 적정기술 혹은 중간기술과 같은 마이크로레벨의 접근을 통한 개도국 개발 담론은 1980년대 그 효과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어 쇠퇴기를 겪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는 다시금 적정기술 관련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디자인계와 비즈니스계에서 적정기술에 주목하면서 실질적이고 지속가능한 임팩트에 대한 기대가 커졌기 때문이다. 저소득층 시장을 공략하라는 BoP(Bott-om of the Pyramid) 비즈니스 컨셉의 탄생도 이러한 흐름을 증폭시켰다.
이러한 적정기술은 개발도상국에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2011년 일본의 원전사태로 인하여 대규모 정전이 발생했을 때에 어둠을 밝혀준 것은 저가의 태양광 전등이었고, 노인들의 보청기를 대체해준 것도 태양광으로 충전 가능한 보청기였다. 일본에서는 사고 이후에도 페달로 충전되는 전력공급기 등을 개발하며, 중앙집중의 에너지원에서 생산하는 에너지에만 의존하지 않는 대안들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적정기술 개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환경적 맥락을 잘 고려하여 적절한 비용으로 개발된 솔루션이 니즈를 갖춘 수혜자에게 공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활용되지 않는 솔루션은 사회적 편익과 변화를 창출하지 못하고, 따라서 그 존재 가치를 잃기 마련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제부터 사례를 들어 적정 기술의 특성과 연구, 보급에 대한 다양한 측면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적정기술의 특징 1. 대규모 사회기반시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적정기술의 사용자 대다수는 개발도상국의 저소득층으로, 이들은 전기, 수도, 도로나 학교, 병원과 같은 공공 인프라가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비록 여러 국제 개발원조 기관들이 인프라 구축에 힘을 쏟고 있지만, 대규모 투자와 정부 협조가 필요한 만큼 이는 매우 더디게 진행되기 마련이다. 이에 기존의 정부주도식 중앙집권적 개발(Top-Down 방식)이 아닌 지역 공동체 중심의 개발(Bottom-Up 방식)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는데, 적정기술은 대규모 기반 시설 없이도 쉽게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맥락에 부합한다.
예를 들면, 상하수도 시설을 대체하는 적정기술 솔루션은 큰 수로관이나 저장 시설 등이 없어도 물의 운반과 정수를 가능케 한다. 타이어 모양의 플라스틱 용기에 끈을 달아 많은 양의 물을 쉽게 길어오게 하는 큐드럼(Q Drum)과 빨대 모양의 휴대용 정수기 라이프스트로(LifeStraw)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시이다. 대규모 산업시설이 없이도 머니메이커 블록 프레스(Money Maker Block Press)로 건설용 자재 흙벽돌의 생산이 가능하며, 전기와 다양한 제품 및 서비스를 판매하는 태양에너지 상점 솔라 키오스크(SolarKi-osk)는 부족한 전기 인프라를 보완한다.
그림 2. 물을 운반하는 큐드럼(Q Drum)과 건설용 자재 흙 벽돌을 만드는 머니메이커 블록 프레스(Money Maker Block Press)
그림 3. 태양 에너지 상정인 솔라 키오스크 (SolarKiosk)
적정기술의 특징 2. 친환경적이다
적정기술은 신재생 에너지원을 활용하거나, 화석연료의 사용을 줄여준다는 점에서 친환경적이다. 태양광 전등 딜라이트(d.light)는 낮에 태양광을 받아 전기를 생산하고 이를 충전지에 저장하였다가, 밤에 LED 전등을 켜는 데 사용한다. 이는 기존의 등유나 나무 등의 화석연료 사용을 완전히 대체하여 이산화탄소 발생을 없앤다는 점에서 친환경적이다. 연료효율 스토브인 엔바이로핏(Envirofit)은 기존 스토브보다 나무연료 사용량을 60% 절감시켜 사막화에 끼치는 환경적 영향과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줄이는데 기여한다. 실제로 적정기술이 잘 응용되는 분야를 보면 에너지(전기가 없는 곳에서의 동력 확보: 인력, 태양광, 풍력, 바이오매스 등), 물/위생(정수, 배출물의 회수/재이용 등), 주거 건축 등 환경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분야가 많다.
적정기술의 특징 3. 현지의 환경에 기반을 두고 개발이 이루어진다
전기가 없는 지역에서도 농수산물의 신선한 보관과 저장을 가능케하는 아프리카식 항아리 냉장고 팟인팟 쿨러(Pot-in-Pot Cooler)는 현지에서 개발된 적정기술의 대표 사례이다. 이 쿨러는 1995년 나이지리아 교사인 무하메드 바 아바가 증발 원리를 이용해 고안하였는데, 흙으로 빚은 항아리 두 개, 모래, 그리고 물만 있으면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중요한 점은 팟인팟 쿨러처럼 현지에서 개발된 적정기술이 사용자의 직접적인 니즈를 바탕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현지 주민들이 실제로 이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또한, 현지에서 조달 가능한 재료와 설비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지역 내 생산이 용이하다. 이러한 솔루션의 생산 가능성은 지역 내 새로운 일자리 창출, 즉 경제적 가치의 증대와 연결되기도 한다.
그림 4. 순서대로 태양광 전등 딜라이트(d.light), 연료 효율 스토브 엔바이로핏(Envirofit), 항아리 냉장고 팟인팟 쿨러(Pot-in-Pot Cooler)
적정기술은 어떻게 연구되고 개발되는가
2000년대 이전까지 적정기술을 다루는 조직은 소수의 정부기관 및 NGO가 주를 이루었다. 영국 프랙티컬 액션(Practical Action), 미국 국립적정기술센터(National Center for Appr-opriate Technology), 콜롬비아 가비오따스(Gaviotas) 등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이러한 공공 섹터 외에도 다수의 학교와 연구소가 적정기술 개발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우선 미국 대학들이 적정기술과 관련된 수업을 개설하기 시작했는데, 2003년에 MIT에 개설된 D-Lab을 필두로, 스탠포드 대학교의 디자인스쿨(d.school),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등 미국의 탑 스쿨들이 관련 수업을 개설했다. 이뿐만 아니라, 대학 내 기술 혁신을 촉진하는 연합 기관 NCIIA(the National Collegiate Inventors and Innovators Alliance)에도 200개에 달하는 등록 대학들이 적정기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2001년 코넬 대학교 학생이 세운 지속가능한 세상을 위한 엔지니어들(Engineers for a Sustainable World), 2002년에 소규모로 시작된 국경없는 엔지니어회(Engineers Without Borders) 등은 오늘날 수천 명 이상의 멤버, 수백 개의 대학 챕터를 통해 수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흐름은 아시아 지역도 예외가 아니라, 싱가폴은 MIT와 공동으로 싱가폴 기술디자인대학교(Singapore University of Techno-logy and Design)라는 새 기관을 열어 기술과 디자인을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며, 일본의 도쿄대학에서는 아이스쿨(i.school)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인간 중심의 이노베이션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 중반부터 나눔과 기술, 국경없는 과학기술자회 등 과학기술 전문가 모임 및 한밭대학교 적정기술연구소, 한동대학교 그린 적정기술 연구협력 센터와 같은 관련 기관과 프로그램이 생겨났다.
학계의 적정기술에 관한 관심과 활동은 실제 제품 개발로 이어진다. 그 예로 스탠포드 대학교 학생들이 개발한 태양광 전등 딜라이트, 신생아 보온기구 엠브레이스(Embrace),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학생들이 개발한 개발도상국 휠체어 인텔리전트 모빌리티 인터내셔널(Intelligent Mobility International), MIT 학생들이 개발한 태양광 살균장치 솔라클라브(Solarclave) 등은 실제 적정기술의 대표적인 예시로 잘 알려져 있으며, 널리 보급되어 그 임팩트를 발휘하고 있다.
기술은 활용되어야 가치를 갖는다, 적정기술을 보급하는 비즈니스
이렇게 적정기술 제품들이 다양하게 개발되고 있지만, 실제 보급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개발 시 의도했던 변화를 창출할 수 없다. 모든 적정기술 제품이 보급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보급에 성공한 경우가 적은 것이 현실이다. MIT 출신들이 모여 적정기술을 개발하는 비영리단체 Design that Matters가 개발한 저가의 신생아용 보온 기구 네오너쳐(NeoNurture)는 2010년 TIME지가 선정한 «세계의 발명품 50선»에 오르기도 했지만, 결국 개발도상국에는 단 한 개도 보급되지 못했다. 오로지 개발에만 초점을 맞추고, 제품의 생산, 유통 그리고 판매까지 고려하지 못한 점, 즉 적정기술 솔루션 개발과 보급에 있어 통합적인 비즈니스적 관점이 부족했던 것이 그 이유이다.
그렇다면 솔루션의 단순 개발을 넘어 실제 적정기술의 수혜자에게 성공적으로 보급된 사례로는 무엇이 있을까? 2012년 포브스지가 선정한 사회적 기업가 30인 리스트인 «Impact 30»에서 총 4명이 적정기술과 연관되어 있는데, 이들은 관개용 펌프를 제조하여 판매하는 킥스타트(Kickstart), 저가의 안경을 보급하는 비전스프링(VisionSpring), 태양광 전등 제조사 딜라이트, 신생아 보온기구 제조사 엠브레이스 등이다. 이 중 킥스타트, 비전스프링과 다양한 적정기술 제품을 보급하는 플랫폼 코페르니크(Kopernik), 이 세 조직을 중심으로 그들의 성공 요인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림 5. (좌) 넓은 타겟 고객들을 대상으로 제품보급에 성공한 엠브레이스(Embrace), (우) 보급되지 못한 실패한 적정기술 네오너쳐(NeoNurture)
킥스타트: 비즈니스 모델은 슬림하게, 고객의 활용성은 최대로
킥스타트는 개발도상국의 절대빈곤층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일시적인 구호물자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경제적 소득을 벌어들이는데 기반이 되는 안정적 생산수단이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빈곤층 대부분이 생계로 삼는 농업을 타겟으로 하여 농업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적정기술 제품으로 관개용 펌프 머니 메이커 펌프(Money Maker Pump)를 판매한다. 이 펌프는 전기, 태양광 등의 에너지원 대신 페달을 밟는 인간의 동력으로 작동되며, 지하 7m의 물을 14m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성능을 자랑한다.
그림 6. (좌) 킥스타트의 대표적 제품, 머니 메이커 펌프(Money Maker Pump), (우) 무료 배포와 판매시 농가들의 펌프 사용 비율 비교
킥스타트는 무료 배포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국제기구들이 모기장을 무료로 배포했을 때 순식간에 재고가 동나버리고, 정작 사람들에게 모기장이 필요할 때는 현지의 모기장 산업이 축소되어버려 더 이상 모기장을 구하지 못하는 사태를 너무도 많이 지켜봐 왔다. 킥스타트는 정당하면서 적정한 가격의 돈을 받고 판매하는 비즈니스가 구축되어야지만 펌프를 판매하고, 유지 보수하는 딜러와 제조사가 건강히 지속가능하게 운영될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펌프를 생계에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비율도 무료로 펌프를 취득한 사람들보다 가격을 지불하고 펌프를 구매한 사람들에게 월등히 높게 나타난다는 경향도 이들 모델의 근거가 되었다.
그리하여 킥스타트는 모든 의사결정과 과정에 있어 비용은 최소화하고 판매를 극대화하는, 철저한 비즈니스적 관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많은 단체들이 현지 내 일자리 창출을 위해 생산기지를 여러 곳에 만드는 반면, 킥스타트는 제조단가를 낮추기 위해 한 공장에서 집중적으로 대량 생산을 하고 있다. 또한, 현지 고객의 니즈를 수시로 반영하기 위해 본사와 R&D 설비는 모두 케냐 나이로비에 두었다. 이와 더불어 유통 비용의 최소화를 위해 판매는 지역 내 농업용 작물이나 장비를 판매하던 소매상에게 딜러십으로 이관, 이 딜러들은 판매뿐만 아니라 유지보수 및 부품공급까지 총괄하여 관리한다.
킥스타트의 차이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기존의 원조기구들이 주로 마을 단위의 커뮤니티에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농기구를 보급했다면, 이들은 각 개인을 그들의 고객으로 인식한다. 생산수단을 개인이 단독 소유할 때 가족을 위해 더 열심히 생계를 꾸려갈 동기부여가 생기고, 유지 보수에 대한 유인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구매 방식에 있어서도 킥스타트는 현지의 맥락을 고려한 솔루션을 제공하는데, 바로 아프리카에서 널리 사용되는 모바일 머니로 펌프를 구매할 수 있다는 점이다. 더불어 킥스타트는 고객들의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해 농법 코칭 서비스까지 제공하고 있다.
Kickstart의 디자인 기준(Design Criteria)
- 소득 창출 (Income Generating)
- 6개월 이내에 투자 회수 (Return on Investment)
- $150 이하의 저렴한 가격 (Affordability)
- 에너지 효율성 (Energy-Efficient)
- 인체공학의 고려 및 안전 (Ergonomics and Safety)
- 이동성 (Portability)
- 설치와 사용의 용이성 (Ease of Installation and Use)
- 강도와 내구성 (Strength and Durability)
- 생산 능력에 맞춘 디자인 (Design for Manufacturing)
- 문화적인 수용성 (Cultural Acceptability)
비전스프링: 새로운 유통 전략과 다양한 제품으로 고객들을 만나다
1998년 개발된 머니 메이커 펌프는 이러한 비전과 전략에 기반하여 현재까지 20여 만개가 보급되었다. 펌프를 사용하는 농가들의 수입은 이전에 비해 평균적으로 10배 증가했다고 보고되는데, 킥스타트는 이 펌프를 2014년경 케냐 전체 농가의 15~20%에 보급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비전스프링은 개발도상국 인구의 시력 저하 문제에 주목한다. AMD Alliance International Study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중 7.3억 명이 시력저하 문제를 겪고 있지만, 개발도상국에서는 안경이 비싸기 때문에 부유층만이 이를 구매할 수 있다. 그런데 시력저하는 가사나 노동의 생산성 저하를 일으키므로 궁극적으로는 저소득층의 소득과 연관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비전스프링은 개발도상국의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저가의 4달러짜리 안경을 판매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저렴한 안경의 개발도 어려운 일이지만, 개발도상국의 인구와 부족한 인프라를 감안할 때 이들을 대상으로 최적의 유통 전략을 짜는 것이 최대의 난제라는 점이다.
사실 유통과 판매 채널에 대한 고민은 이미 인도나 아프리카에 진출한 수많은 다국적 기업들을 좌절케 한 중요한 요인이다. 물품 배달 트럭이 달릴 수 있는 도로 자체가 제대로 깔린 지역이 적은 상황에서 뿔뿔이 흩어져 있는 억 단위의 고객을 발굴하고 찾아가 제품을 판매하는 데서 실패를 겪는 것이다. 이에 세계적인 소비재 기업 유니레버는 인도에 진출할 때 오랜 고전 끝에 샥티(Sh-atki)라는 여성 판매원을 양성하여 유통 문제를 해결했는데, 비전스프링도 이 점에 착안하여 유사한 방법을 채택하였다. 즉, 비전 앙트르프러너(Vision Entrepreneur)라는 판매원을 모집하여 간단한 검안을 할 수 있는 정도의 교육과 훈련을 제공하고 이들을 통해 안경을 파는 것이다. 이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시력검사를 수행하고, 검안사에게 시력 정보를 보낸 뒤, 완성된 안경을 다시 사람들에게 배포하는 몫을 담당한다. 또한 비전스프링은 현지의 NGO와 효과적으로 협력하여 판매 네트워크의 규모를 빠르게 키우는데, 이에 따라 방글라데시에 진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NGO인 BRAC과 손을 잡았다.
그림 7. (좌) 비전 앙트르프러너(Vision Entrepreneur), (우) 비전 앙트르프러너의 판매 가방
비전스프링은 또한 고객의 니즈를 바탕으로 안경 라인업을 넓혀나가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보급형인 싱글 비전 글래스(Single Vision Glass) 하나로 출발한 제품 라인은 이제 여러 직업과 작업 환경을 가진 소비자들을 위해 다양한 솔루션을 보유하고 있다. 장거리 운전사들의 원시, 근시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주는 이중초점 안경, 야외에서 오랫동안 직사광선을 바라보는 농부들을 위해 빛에 따라 렌즈 채도가 바뀌는 포토크라믹(Photochromic), 채도는 유지되는 가운데 UV보호 기능이 강한 보호안경(Protector) 등이 그 예이다. 이는 저가 BoP 시장 안에서도 고객 이해를 바탕으로 세분화된 제품 개발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전스프링은 2001년 설립 이후 지금까지 백만 개의 안경을 보급했고, 9,000여 명의 비전스프링 앙트르프러너를 배출했다. 아울러 연구에 따르면 시력이 안 좋았던 때에 비하여 안경을 보급 받은 이후 일상생활의 노동 및 가사 생산성은 35% 향상되며, 경제적 편익을 계산했을 때 비전스프링에 기부된 1달러의 효용 가치는 약 55배로 추산된다고 한다.
그림 8. 비전 앙트르프러너 (출처 : visionspring.org)
코페르니크 : 적정기술, 플랫폼을 통해 널리 퍼지다
코페르니크는 저가의 태양광 전등 딜라이트를 보급하는 주된 파트너 기관이자 약 50여 가지의 다른 적정기술 솔루션을 보급하는 플랫폼이다. 세계 각지에서 적정기술 제품이 적극 개발됨에도 불구하고 실제 보급 비율은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무르는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창립자들은 개발된 적정기술 제품과 그것을 필요로 하는 NGO를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코페르니크를 설립했다.
코페르니크는 초창기에는 주로 개인이나 기업의 후원을 받아 무료로 제품을 보급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적절한 가격을 받고 솔루션을 거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변화해가고 있다. 이는 가격을 지불하고 기술을 구매한 고객이 보다 책임감을 갖고 제품을 사용해나가고, 실제로 생활의 변화를 성취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물론 구매력이 적은 고객들에게 할인을 제공해주거나 수개월 분납이 가능한 할부 거래와 같은 다양한 결제 방법 또한 제공하고 있다. 코페르니크 역시 비전스프링과 유사하게 인도네시아 내에서 페카(PEKKA)라는 여성 방문 판매원을 양성하여 적정기술 제품을 홍보, 판매하고, 유지보수 하게끔 하고 있다.
플랫폼으로써 코페르니크가 갖는 가치는 수많은 적정기술 제품 간 평가를 가능하게 하는 점이다. 태양광 전등만 하더라도 코페르니크가 보급하는 대표적 솔루션인 딜라이트 외에도 수십여 종의 전등이 존재하며 각 니즈에 맞게 활용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멤브레인(여과제균), 증발법, 화학처리 등의 다양한 정수 방법에 따라 정수기도 수많은 종류가 있다. 코페르니크는 개발도상국 NGO들이 한눈에 이 제품 정보들을 볼 수 있게 정리해 놓는다. 각 제품의 가격, 평균적인 사용연수, 유지보수 정책뿐만 아니라 과거에 그 제품을 사용했던 다른 NGO들의 평가도 읽을 수 있는 이러한 이용자 환경은 마치 우리에게도 친숙한 인터넷 쇼핑몰과 유사하다.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솔루션의 보급을 담당하는 NGO들은 자신들의 활동에 적합하면서도 신뢰할 수 있는 최적의 제품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코페르니크는 제품 평가를 적극적인 피드백, 혹은 개선책까지 제조사에게 전달한다. 적정기술 사용자들이 웹사이트나 SNS를 통해서 특정 제품에 대한 피드백을 코페르니크에 보내면 이들은 제조사에게 이를 다시 전달한다. 기술의 효용성과 활용성을 개선하는 피드백 루프의 중요한 연결을 코페르니크가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적정기술 생산자와 사용자 간의 다리 역할을 하는 코페르니크는 앞서 소개한 킥스타트나 비전스프링과 비교시 가장 최근인 2009년에 설립되었지만, 현재까지 74,000명에게 적정기술 14,000여 건을 보급하는 남다른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적정기술의 미래를 진단하다
적정기술의 미래는 어떠할까? 앞에서 살펴보았듯, 적정기술의 친환경적인 측면은 환경 기술에 대한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큰 오늘날의 사회적 니즈에 잘 부합한다는 점에서 그 미래가 밝다. 또한, 기술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 최근 재생 에너지 사업의 성장으로 저가의 솔라 패널이나 LED 관련 기술이 크게 발전하여 적정기술 제품에 활용되는 다양한 기술의 원가가 낮아지는 긍정적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경제적 측면을 살펴보자면 세계적인 기업들이 금융 위기 이후 정체된 경제 성장의 돌파구를 BoP 시장에서 찾고 있는 흐름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신시장으로서의 BoP 시장에 대한 기업들의 관심과 전략적인 접근은 적정기술의 발전 및 활용과 만나는 지점이 있기에 그 발전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예로 GE가 중국, 인도 시장을 겨냥하여 개발했던 소형 저가 심전도기인 MAC 800은 중국, 인도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성공을 거두어, GE가 적정기술 시장에 주목해야 하는 당위성을 높여주었고, 다른 다국적 기업들에게도 좋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사레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측면들을 모두 고려했을 때, 적정기술은 이처럼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동시에 창출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작은 변화로도 큰 임팩트를 낼 수 있는 국제개발 분야에서 적정기술의 중요성은 앞으로도 커질 것이다.
Contributors
윤서영 & 조아라 (한국 코페르니크, seoyoung.young@gmail.com & ara.cho@gmail.com)
윤서영은 서울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두산그룹 전략실인 Tri-C 팀에서 근무하였다. 비즈니스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며, 자연스럽게 적정기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 적정기술 플랫폼 Kopernik의 한국지부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사단법인 Root Impact에서 근무 중이다.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도시편” 번역에 참여하기도 했다.
조아라는 서울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현대카드 캐피탈 재무기획팀에서 근무했다. 반년 동안의 네팔 생활 이후 보다 실용적인 방식으로 사회/사람들의 생활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에 관심을 가졌고 적정기술을 접하게 되었다. 현재 적정기술 플랫폼 Kopernik의 한국지부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사단법인 Root Impact에서 근무 중이다. 번역서로 사회적 기업가 에세이 “클릭클릭! 클릭으로 세상을 바꾸다”, “인생의 지도”가 있다.